역사속으로

[스크랩] 문무왕 비문의 비밀

청수블로그 2009. 9. 28. 20:27


[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방송 : 2008. 11. 2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추적’
그 첫 번째 시간!

<문무왕릉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신라의 시조인 성한왕은 누구인가?
투후는 누구인가?
과연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 비문 속에 숨어있다.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문무대왕 능비 기단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 귀부

 

경주박물관에 있는 사천왕사지 귀부 머리부분                    비석 하단부 (1961년 발견)

 

                                         비석 상단부 (2009. 9. 3 발견)

 


 

1.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그리고 투후(?侯)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인물 성한왕. 그리고 문무왕릉 비문에 등장하는 또 다른 글자 <투후>와 <15대조 성한왕>은 비문의 주인공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인가?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묘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무위시 김일제 석상


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일까?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적석목곽분
비문이 던지는 암호들. 그 화두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따라 가는 역사적 ‘진실’의 추적! 미스터리 여행은 2편에서도 계속된다.


- 제2편 ‘왜 흉노의 후손이라고 밝혔나?
몰락한 흉노의 자손임을 내세운 신라 김씨 왕족. 북방의 오랑캐 족으로만 여겼던 ‘흉노족’의 후예들이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대제국을 세웠던 흉노의 후예들, 그들은 왜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 역사적 흔적들을 찾아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제2편은 29일(토) 밤 8시 10분에 방송됩니다!

[제2회]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방송 : 2008. 11. 29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창범 PD

‘역사추적’그 두 번째 시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

비문 속 주인공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과연 존재했는가?
흉노족은 정말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는가?
과연 수수께끼 같은 문무왕 비문의 비밀은 풀릴 것인가?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신라 문무대왕비 상단부 찾았다. 2009. 9.3

경주 주택 수돗가서 200여년만에 표면 훼손됐지만 내용 판독은 가능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다시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한 부분이 200여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북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상단부 비석

신라 제30대 문무대왕릉비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사라진 지 200년 만에 해후했다.

  

 

 

경주 시민들이 문화재에 관심과 보존의식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비의 조각은 장독대와 수돗가 옆에서 발견됐다.

수돗가 빨래돌로 사용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돌 표면에 쓰여진 글자가 한자라는 것은 까막눈이라도 알 것인데...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찌하면 저렇게 무관심하고 무식한 일이 있겠는가 ?  한국인이라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이 비편들의 탁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의

'해동금석원'에 비문이 실렸다.

 

문무왕릉비 판독문

 
이 비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 수도검침원이다. 지난 1일 저녁 이 여성은 야학에서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김 부회장이 "최근 포항 중성리에서 '신라 최고(最古) 비석'이 발견됐다"며 "여러분 주변에 중요한 비석이 널려 있을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순간,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검침했던 집 수돗가에 박힌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김 부회장에게 알렸고 김씨의 제보를 받은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지조사를 했다. 박물관은 "비편(碑片)은 높이 66㎝, 너비 40㎝ 크기로, 앞면에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1796년(정조 20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비석의 실물은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가 1961년 아랫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윗부분이다. 오영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번에 비석 윗부분이 발견된 장소는 아랫부분이 있던 지점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이라며 "애초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비석이 경주 관아로 옮겨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측은 덧붙였다. 박물관은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비석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마당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상태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비편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성한왕은 누구인가?
▲대능원



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동복



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존재했는가?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4.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그렇다면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화천



5. 성한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해동비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흉노왕의 후손 투후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2009/01/09 오 전 4:15 | 김수로왕과 허황옥



▲ 신라왕족의 조상이라는 김일제의 석상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 

  
1200만 인구를 자랑하는 한국 김씨들의 성(姓)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세계 최초로 '金'을 성씨로 사용한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와 한국의 김씨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초로 김씨의 연원을 찾는 이색 탐사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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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근의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는 대체로 274개 성씨에 4500만명 가량이다. 이중 김씨는 241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고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가위 민족세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대체로 신라, 가락(가야)의 두 집단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귀화해 사성(賜姓)을 받은 김씨가 별도로 있다. 여기다 가락계 김씨의 외가인 허씨 집안 및 허씨가 당나라 때 당태종으로부터 사성을 받은 인천 이씨 등도 범(凡) 김씨 계열에 포함된다.

그런데 김씨 계열 중 신라와 가락의 양대 김씨는 족보상 그 선조가 난생설(卵生設)이나 천강설(天降說)의 주인공으로 묘사됨으로써, 그 전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신라계인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라고 한다. 또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창시자인 ‘김수로’를 꼽는다. 이들 모두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어느 민족이건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신비스러운 전설로 미화시키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김알지와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0년 전의 일이다. 이때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이미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고, 철기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갖가지 신무기가 개발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나름대로 문명의 첨단시대였다.

이런 개명(開明)한 시대에 김알지나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필자 자신이 김해 김씨지만 김수로나 그 부인인 허왕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서, 틀림없이 출자(出自)를 내놓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연을 밝혀낸다면, 김알지와 김수로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생의 비밀도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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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궁금증의 주인공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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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 필자는 ‘한민족 정체성을 찾는 답사팀’을 만들어 보름 일정으로 중국을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20년간 궁금해 마지 않던 ‘김일제(金日?)의 묘’ 존재 여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김씨 성의 주인공 김일제, 그리고 막연하게 몇몇 전문가의 입으로만 전해오는 ‘김일제의 묘’의 실재 여부는 김씨 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 많은 필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1978년 필자는 김알지, 김수로가 등장하기 150여년 전에 이미 김씨 성을 가진 김일제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년 전 작고한 재야사학자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 ‘가야사’ (백문당, 1978)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역사 연구를 강도 높게 비평하며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정창씨는 이 책에서 김일제가 한국 김씨들의 직계 선조가 된다는 것을 여러 전거를 들어 밝히고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학설이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89년 한국문자학회 회장 김재섭(金載燮·66)씨에게 중국의 금문(金文)을 배우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았다. 김일제의 묘가 한(漢)나라 7대왕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의 무릉(茂陵)에 함께 배장(陪葬)돼 있다는 정보였다.
또 고(古)문자학을 공부하면서 김일제의 성(姓)인 김이 한무제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즉 한무제가 특별히 내려준 성이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말하자면 김일제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김’을 성씨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김일제가 과연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묘가 실제로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에 배장돼 있는지, 도무지 막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인 동양 3국에서 성의 글자가 같다고 해서, 먼저 살다 간 유명 인물에게 족보를 갖다붙여 그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92년 중국과 국교가 트인 후부터 이제는 마음놓고 김일제의 묘를 확인해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무릉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모아본 결과, 한나라 왕 무제를 도와 서역(西域)을 개척한 영웅 곽거병(?去病·140∼117 BC)의 묘는 있어도 김일제 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곽거병이 누구인가. 그는 바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김일제와 그의 동생, 또 그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온 장본인이었다. 김일제로서는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과 나란히 무릉에 배장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빈손으로 돌아올지언정 일단 무릉을 찾아 주위에 널려 있다는 많은 묘소를 이잡듯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중국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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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곽거병, 초라한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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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무릉을 찾은 것은 6월12일 오시(午時)였다. 섭씨 34도로 땡볕이 지독했다. 일제 마이크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쿡쿡 찔러 올 정도였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기후인데도 열탕에 앉아 있는 듯 온몸에서 땀이 배어 올랐다. 땀이 나면 건조한 공기가 그대로 빨아 마셔버리니, 햇볕에 내놓고 있는 얼굴이며 목이며 팔의 피부가 따가웠다.

그런데 햇볕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가 민가 하던 김일제의 묘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더냐는 속담은 역시 들어맞았다.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가 부실했을 뿐이지, 현장에는 김일제라는 인물에 대해 해설을 해놓은 책자와 묘지 안내 간판까지 걸려 있었다.

김일제가 한국 김씨의 시조든 아니든 간에 2100년 전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의 묘는 현재의 지명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김일제의 묘는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곽거병의 묘에서 보면 동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중국측 묘지안내 자료에 의하면 김일제에게 할당된 묘역은 1만8748m2. 묘의 높이는 12m, 분묘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1479평방m2에 이르렀다. 묘는 남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아마 경주의 천마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무릉의 주인공인 한무제의 묘나 한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한 곽거병, 위청(衛靑) 장군 등의 묘 규모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곽거병의 묘역은 경내에 웅장한 담벼락을 두르고 있었고, 그 들머리에 무릉박물관을 만들어 화려한 연못과 높은 관망대까지 조성하는 등 그것만으로도 관광명소로 만들어두었다.

반면 김일제 묘는 사대부 집의 대문간 청지기가 사는 집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김일제의 묘역은 주위가 담벼락 대신 밀밭과 과수원이 울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 해당하는 묘의 코앞에 배나무 과수원이, 옆구리며 머리 쪽에는 밀밭이 들어서 있었다. 말하자면 입구나 출구가 모두 봉쇄된 무덤이었다.
아무리 봐도 조금은 섭섭한 대접을 받는 묘였다. 빈정대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그저 한무제의 미덕을 칭송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한 묘라고나 할까.

김일제가 한족(漢族)이 아닌 흉노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무릉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무릉 관련 책자에는 김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현지에서 ‘미티(Miti)’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런 묘를 만들어 두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릉과 곽거병의 묘이니, 그곳에만 관광객이 모일 것은 뻔하다.

묘하게도 중국의 역사에 굵은 선을 그어놓은 영웅 곽거병의 묘 앞에는 곽거병의 전공을 새긴 ‘마답흉노석상(馬踏凶奴石像)’이라는 석조물이 조성돼 있다. 말 그대로 곽거병이 타던 천리마가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 답사팀은 말에 짓밟힌 흉노족이 곽거병이 죽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답사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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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묘에 분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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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의 후손들이 한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100여년 동안은 후손들의 참배가 거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후 지리멸렬해졌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놓고 이 묘를 찾을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 듯 잔디가 벗겨져 사방으로 흙색의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 여러 갈래의 산책로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묘에 오르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묏등 전체에는 무릎까지 오는 키 작은 가시나무가 고르게 덮여 있었다.

이곳에서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고,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장지염(張志廉·50)씨는 할아버지대부터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작년 2월인지 3월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주 요령성에 있는 60∼70대의 할아버지 두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김씨라고 하면서 묘에 절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 묘를 찾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일제 묘에는 남쪽에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았다. 답사팀은 처음에는 묘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릉에 배장될 정도의 묘라면 묘비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이 나서서 묘비 수색 작업을 벌였다.
아니나 다를까. 묘의 남쪽 정면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무작정 과수원 속으로 20여m 들어갔더니 묘비가 있었다. 묘비는 어른 키만한 배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어 눈여겨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밭 주인인 50대 아주머니가 뛰어와 허락도 없이 들어갔으니 고발하겠다며 심하게 투덜대는 것을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답사팀 중 김씨 성을 가진 일행이 인사라도 올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 김일제의 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배나무 과수원 속에 있는 묘비 앞에는 차례를 지낼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의 동쪽 넓은 터에다 말리고 있는 밀짚을 약간 걷어내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만든 순수한 우리 향을 피우고, 전남 승주에서 신광수(申珖秀)씨가 직접 만든 작설차를 올렸다. 제주는 답사팀 팀장인 김세환(金世煥·70)씨가 맡았다. 신라 김씨 계열의 의성 김씨(義城金氏)인 김세환씨는 답사를 나서기 전 김알지가 탄강했다는 경주 계림을 찾아서 중국의 김일제 묘를 찾으러 간다고 고유제를 올릴 만큼, 김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그는 차례를 지내는 동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답사팀 모두가 경건하게 차례를 올렸다.
과수원의 나무에 달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축문으로 삼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묘소를 한 바퀴 돌며 좋은 날을 잡아 차례다운 차례를 올릴 것을 다짐했다. 답사팀은 물론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가 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차례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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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km의 사막, 河西走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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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김일제는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답사팀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김일제라는 인물이 태어났던 기원전 2세기경 김일제를 둘러싼 내외 사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휴도가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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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와 곽거병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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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7대 임금으로 16살난 무제가 즉위한다(기원전 140년). 무제는 즉위와 함께 흉노정벌을 왕조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제국의 세계쟁패를 위해서 흉노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흉노정벌에 노심초사하던 무제는 이웃 월지국이 흉노에 짓밟혀 하서에서도 서쪽고원으로 옮겨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신하인 장건(張騫)을 파견해 월지와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되레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유배당했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월지왕을 찾아가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편안히 안주하고 있던 월지를 움직일 수 없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러나 장건은 매우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온다. 대원이라는 나라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흉노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대원정벌에 나서서 수많은 천마를 얻게 된다. 천마를 얻고 나서부터 무제의 정벌이 순조로워진다.
드디어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명의 정예군단을 편성해 위청 장군과 합류하면서 하서지방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 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배장되도록 했던 것이다.
김일제라는 인물은 한무제가 아니면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제는 한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傳)’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물론 철저하게 한인(漢人) 본위로 기록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놀랄 만한 역사의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20여년 전 문정창씨의 ‘가야사’에서 처음 김일제를 만난 이후 ‘한서’의 ‘김일제전’을 찾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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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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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이르기를(贊曰),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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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벼슬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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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 신뢰를 받았음). 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상은 태복(太僕)이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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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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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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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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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신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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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실에 등장하는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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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정창씨나 김재섭씨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한번 각인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김일제가 김씨의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하든 말든 고문자학은 중국인 학자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신농과 황제 소호김천 등 삼황오제시대가 실제의 시대라고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지금 한국문자학회는 역사의 시작시대인 삼황오제시대가 또한 고조선시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일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희망 찬 미래를 위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일 뿐이다.

2008년 3월

《 금의 시조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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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始祖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三姓 淵源譜나 경주김씨 족보(북쪽 발행)를 살펴
보면 항려운동을 주도한 왕자로 奮왕자와 鎰왕자 두 분을 들 수있다. 그런데 남쪽에
서 발행된 경주 김씨 족보에는 奮왕자가 빠져 있다.

또 우리가 알기로는 경순왕의 부인이 竹房婦人박씨, 낙랑공주 王씨, 별빈 안씨부인
이렇게 세부인을 둔 것으로 알고있는데, 三姓淵源譜를 보면 첫째부인으로 松希부인
(昔씨)이 나오고있다. 뿐만아니라 송희부인은 5왕자를 둔것으로 기록돼어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하게 고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왕자들 중의 한분이 금나라 시조 금함보와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松希 부인의 5왕자 함자를 보면 佺, 瑤(完山君), 琨, 英(廣州君), 奮(三大君)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 궁굼한 사항을 추론 해보기로 하자.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양위
하였을 때 신라 조정에서는 무기력하게 왕권을 넘겨 주었을까?
아니다! 삼성 연원보를 보면 왕 앞에서 자결한 왕자가 2명이나 나온다(松希婦人의 소생
임). 佺왕자와 琨왕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간 왕자가 2명인데 송희부인의 다섯째 奮왕자와
박씨왕비의 첫째 鎰 왕자이다.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를 마의태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두 왕자 모두 마의태자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금강산으로 들어 갔다는 것은 신라 부흥운동을 위하여 떠났다고 볼 수있는 것이
다. 그리고 그 당시 신라에는 왕건의 반대 세력이 많았는데 아마 수 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猛將軍으로 전해지고있다.
즉 한계산성과 설악산 일대가 신라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추정 할 수 있는 곳이다
(역사 스페설 미스테리 마의태자에서 보여줌).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실제 군사행동
에 돌입하기 위해서 군사훈련이 있엇을 것으로 보며 그 시기와 때를 기다렸을 것이
다. 그렇지만 실제 군사행동에 들어 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왕자들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한편 부왕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군사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군사행동을 하기
위한 시기를 저울질 하였을 것이고 또 왕자들은 신분을 노출하지 않을려고 이름도
가명으로 사용 하고, 승려로 위장하면서 때를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려의 군사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또 경순왕도 장수를(92세) 하였기 때문에
고려를 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지내다 결국 왕자들의 나이도
60세에 가까왔을 것이고 맹장군도 사망하여 고려땅에서 부흥 운동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두 왕자중의 한분이 만주로 건너 갔을 것아라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금함보는 두 왕자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부터 금함보의 출생년
도를 살펴 보기로한다.



고려사 세가 예종편을 보면 아골타의 계보가 적혀 있는데 여길보면 아골타는 금함보
의 5代孫으로 기록돼어있다.


금함보=금준=금행 → 금극수 → 고을 → 활라 → 핵리발 → 아골타



문헌에 따라서는 6대손, 7대손, 8대손등 제 각각이다. 이것은 世와 代 구분을 잘못해
서 한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5代孫=6世孫, 6代孫=7世孫이 올바른 표기이다.


그럼 두가지 경우로 금함보의 출생년도를 살펴보자. (금함보의 출생년도는 아주 중요
함)

첫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5代孫인 경우

1세대를 20년으로 보고 아골타가 금을 건국 하였을 때를 47세로 보면 20×5=100,
100+47=147, 그리고 금함보가 만주에 건너 갔을때 이미 60세 이므로(금사에 기록됨)
147+60=207 다시 말하면 金 나라 建國 207년전에 태어난 인물이 금함보인 것이다.

금의 건국이 1115년 이므로 1115-207=908 오차 범위를 5년으로 보면 908년 또는 913년
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멸망이 935년이니 이때 금함보의 나이는 22세 또
는 27세로 추정되어 실제로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鎰왕자(마의태자)의 나이가 신라
멸망시 20세 초 였을 것이므로 금함보는 확실히 마의태자 자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6대손인 경우

마찬가지로 20×6=120, 아골타(1068~1123)가 47세에 금을 건국하였으므로
120+47=167,금함보가 만주에 들어 갔을 때 60이므로 167+60=227 즉 금 건국 227년 전
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1115-227=888이므로 신라 멸망시 47세가 된다고 볼 수있다.
다만 1세대를 20년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오차 범위가 10-20세까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도 우리 派祖의 22
代孫인데 계산법으로는 20×22=440이지만 실제로는 547년으로 107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러한 대수 계산에서는 한세대별로 4-5년정도 오차범위를 두는 것이 바람직
하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상기연대는 오차범위 안에 들기 때문에 금함보는 일왕자
또는 분왕자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것은 금사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기록돼어있는 3형제
에 관한 부분이다.  원래 송희부인의 소생은  5형제 이지만 두 왕자가 경순왕 앞에
서 자결 하였기 때문에 삼형제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금사와 동사강목에서 삼형
제라고 기록된 부분과도 완전히 일치 하는 것이다. 삼형제의 함자는 요(완산군),  영
(광주군), 분(삼대군)이다. 

<다만 이 글에서 분왕자를 거론한 것은 분왕자가 개골산으로 들어 갔다고 기록돼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왕자인 영왕자도 금함보가 될 수있다는 �

출처 : 안 산 김 씨
글쓴이 : 희망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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